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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울컥

 

사직서

 
 기어코 사단이 나고야 말았다. 폭발 일보 직전의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그간 용케도 잘 버텨냈던, 불혹의 형님은 그렇게 병원을 떠났다. 입사 전, 면접실에서도 인턴이나 전공의를 할지 말지 고민을 참 많이했다는 그 형님은 그렇게 짐을 꾸려 병원을 떠나고야 말았다.

 올해 40을 채운 그 형님은 한 가정의 가장이자 토끼같이 귀여운 두 아이의 아빠다. 어린시절, 생활이 무척이나 어려웠고 고교시절엔 선생님과의 불화로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기도 하였으며, 어찌어찌 진학한 대학에선 역사학을 전공했다. 변변치 않은 벌이와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늘 힘들었지만 지금의 형수님(약사)을 만나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그래도 형편도 조금 나아지고 의대에 진학하여 의사가 될 꿈까지 가질 수 있었다.

 34살에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젊은 학생들과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도 유급한번 당하지 않았고, 뛰어나진 않지만 어디 내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성적표를 받아들고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졸업 후 바로 개원할까도 심각하게 고민해봤지만 그렇게 하기엔 임상 경험이나 지식이 너무나 부족했으며, 수차례 고민끝에 인턴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다.  

 첫 면접 당시, 인턴 지원자 중에 그 누구보다 폭발적인 열정과 자신감으로 중무장해서 면접에 임했던 형의 모습이 불현듯 떠오른다. 왜 지원했으며 어떤 의사가 되고 싶냐는 말에 뛰어나진 않아도 환자를 생각하는 친절한 의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그 형은 지난 3개월간 힘든 근무 와중에도 늘 웃음을 잃지 않고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몸이 아퍼서 병원을 방문한 환자뿐만 아니라, 스테이션에서 일하는 간호사, 환자를 나르는 병동원, 숙소를 치워주는 청소부 아줌마까지 병원에서 만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항상 먼저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안부를 묻고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웃고 즐기며, 힘든 일이 있으면 함께 슬퍼하고 고민해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입사 후 형은 날이 갈수록 짜증이 늘어갔다. 늑대별 선생님이 포스팅에서도 밝혔듯 비정규직 노동자 인턴에게 부과되는 과중한 업무와 부족한 수면시간, 최저수준의 수당, 주치의 업무 부과 및 한달에 4번(12시간)뿐인 오프 등은 한 가정을 짊어져야 할 40대 가장에게는 너무나 힘든 것이었다. 여기에 근무를 하면서 받았던 남모를 고통들,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 것들이 욕하고 깨고 무시당하는 일, 환자와 보호자들의 끊이질 않는 액팅 등 형이 견디기에는 지난 3개월은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다.

 급기야 ER 마지막 근무인 어제, 그동안 쌓이고 쌓인게 ED과장님과의 트러블로 폭발했고 분노를 삭힐 수 없었던 형은 결국 3월에 가져온 숙소의 모든 짐을 꾸리고 떠나버렸다. 사실 7월 즈음에 그만둬야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던 형이었지만, 막상 조금 이른 시기에 병원을 그만두고 떠나는 형의 모습을 보면서 착잡해지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다행히 떠나기전 숙소에서 형을 만날 수 있었고 다시 한번 생각해주라, 1년은 함께 채우고 마치자 등 떠나려는 형을 붙잡으려 애써 노력했지만 이미 떠날 결심이 서버린 형의 발걸음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생각해보면 형은 요근래 여유가 있을때마다 메디게이트나 알바자리, 로컬 부원장 자리 등을 알아보느라 바뻤고 로컬 경험이 있는 동기 인턴과 관련하여 많은 대화(예를 들어 치료 메뉴얼이나 생활 등)를 주고 받았었다.

 형은 그렇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형수님과 함께 숙소에서 가져온 짐을 차에 싣고 쓸쓸한 마지막 인사를 나눈 후 병원을 나섰다. 아마 오늘 오전 즈음 교육부에 사직서를 내러 간다고 했으니 이미 모든 상황이 종결되었을런지도 모른다. 애써 형을 다시한번 붙잡아보자는 나의 말에 이미 한차례 타병원을 그만둔적이 있는 또다른 인턴 동기 형은 붙잡아도 소용없을 것이라며 그냥 보내주자고 말했다. 

 요근래 포스팅에서도 밝힌적이 있지만 무척이나 피곤하고 고단한 인턴의 삶 속에 회의감을 느끼고 있던 찰나 가장 따르고 사랑했던 형의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무척이나 느끼는 바가 많고 슬프다. 유난히 병원의 부실한 대우나 부당한 처사에 불만이 많았고 늘 그런 문제의 개선을 위해 앞장서서 노력해 왔지만 이제 그런 형이 없다는 생각에 한편으론 걱정도 된다. 

 떠나간 형의 모습을 보며 나 역시 관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인턴은 하루하루를 그냥 지나간다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한 선배의 말을 떠올리고 오늘도 힘들고 괴롭고 짜증나도 이 악물고 버텨보자 다짐해본다.

by Polycle | 2009/06/01 12:10 | 인턴일기 | 트랙백 | 핑백(1) | 덧글(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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