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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의 말턴을 아시나요?

 
 군대에 말년 병장이 있다면 병원에는 말턴이라 불리우는 게으른 존재들이 있다. 3월 신삥때와는 다르게 말턴의 몸과 마음은 모두 아름다운 느림의 미학에 촉촉히 젖어있다. 웬만해선 ABR(absolute bed rest)모드에 응급이 아니라면 콜이 와도 달려가는 일이 거의 없으며 픽턴이 아니라면 윗년차 눈치보는 일이 거의 없고, 드레싱이나 폴리, L-tube 등의 각종 술기가 귀찮아지는 그런 시절을 나는 보내고 있다.

 요근래 병동 간호사들에게 '선생님 예전보다 많이 게을러졌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걸 보면 나 역시도 말턴의 유혹을 피해갈 수 없었나보다. 아무래도 일이 익숙해지고 어느정도 똥오줌은 가릴 위치가 되다보니 종종 일을 미루기도 하고 요령을 피우는 경우도 확실히 늘긴했다. 허나 어쩌겠는가, 3월같은 신선함과 빠릿빠릿함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엔 너무나 많이 상해버린 것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슬렁슬렁 병동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던 찰나, 중환자실에서 드레싱하던 환자의 상처에 눈에 띄게 고름이 늘어나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상처를 소독하는 내내 그간의 게을렀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래서인지 다른 때와는 달리 더 신경써서 고름을 짜내고 가피를 제거했다. 평소 같았으면 5분내에 끝냈을 소독을 장장 20여분에 걸쳐 땀을 뻘뻘 흘려가며 마무리 지었다.

 때마침 중환자실 보호자 면회시간이라 보호자들이 우수수 환자곁으로 몰려들었고, 내가 드레싱하던 환자 보호자 역시 환자곁으로 다가와선 환자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상처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가피를 제거하고 고름을 짜낸 탓인지 더 깨끗히 보였던 상처를 가리키며 보호자는 내게 '선생님 덕분에 아버님 발이 깨끗해져서 기분이 좋다'며 '아버님이 여기저기 많은 병원을 다녀봤지만 선생님처럼 환자를 꼼꼼히 돌보는 의사는 처음이라며 역시 환자를 살리는 의사라는 직업은 존경받아야 마땅하다'며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내게 건넸다.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과연 내게 그 환자 보호자로부터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었을까. 언제부터인지 환자를 질병 혹은 작업의 대상으로만 생각해왔던 내가 과연 환자를 위하는 의사가 될 자격이 있을까란 생각에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학창시절, 의사는 병뿐만 아니라 사람을 보아야한다는 한 교수님의 말이 머릿 속을 계속해서 맴돌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만들었다. 질병이 아닌 인간을 마주하는 존경받는 의사, 학창시절 참으로 쉬워보였던 그 말이 현실에선 참으로 어려웠다. 과분했던 그 보호자의 감사와 존경을 뒤로한채, 3월 시작하는 초턴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 환자를 돌보겠노라 다짐해본다. 


by Polycle | 2009/10/12 11:13 | 인턴일기 | 트랙백 | 핑백(2) | 덧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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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걱정마제인 at 2009/10/12 11:18
이런 의사 분들이 많아져야 할 텐데.. 다들 티는 안내도 다들 이런 마음은 가지고 있겠죠?
항상 화이팅입니다~~^^
Commented by Polycle at 2009/10/12 12:05
아마 대다수의 선생님들이 저와 비슷한 마음이리라 생각합니다. 또 당연히 그래야하구요.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샛별 at 2009/10/12 11:23
1년 365일.
작심삼일을 121번만 하면 363일.

그냥 그 마음을 작심삼일하고 121번만 하세요 ㅋㅋㅋ

제가 요즘 그럼니다
Commented by Polycle at 2009/10/12 12:05
작심삼일 121번 하고 이틀은 휴가 주는건가요? ^^
Commented by 샛별 at 2009/10/12 13:17
빙고~! ㅎㅎㅎ
Commented by asianote at 2009/10/12 12:41
역시 마지막에 갈수록 본색이 드러나는 것은 어느 조직이나 동일하군요!
Commented by 츄베랄 at 2009/10/12 13:45
언제 어디든지 초심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힘내세요! ^^
Commented by 푸리 at 2009/10/12 14:56
제 친구도 말턴인데 피곤하다구 제 전화도 안 받아요 -_-... 이건 뭥미
Commented by 먹보 at 2009/10/12 14:57
ㅋㅋ 시간이 들어맞긴 했지만 그래도 보호자 분이 폴리클 님을 칭찬하는 거 보면 의사로서
인정을 받으시는 거네요..너무 자책하지 말고 남아일언 중천금입니다!^^
Commented by AyakO at 2009/10/12 15:05
말턴의 다음 단계는 다시 과에서 가장 비천하고 가장 긴장해야 하는 1년차죠... -ㅅ-
Commented by Jill Valentine at 2009/10/12 15:15
학창시절 그 교수님 참 좋은말씀해주셨네요.
그말만 잊지마시고 충실하신다면
더욱더 존경받는 의사가 되실겁니다. ^^
Commented at 2009/10/12 16:4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rainblue77 at 2009/10/13 23:54
이렇게 가끔씩 자신을 돌아 보면서 반성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한 것 같아요.

자기 반성이라는 것이..말처럼 쉬운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좋은 의사선생님이 되실 것 같아요..^^

Commented at 2009/10/14 10:5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9/10/14 17:4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9/10/19 15:1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9/12/16 12:17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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