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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명의 환자를 떠나보내며,

 

 지난 6개월간 병원에서 일하면서 참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갈 수 있었다. 오늘 소개할 302아저씨 역시 그 수많은 인연 중 한 사람이었다. 아저씨와의 첫 만남은 응급실 근무 당시에 이루어졌었다. 오전 9시, 근무를 마치고 퇴근할 때즈음 여느때와 다름없이 뇌경색이 의심되는 환자 한명이 구급차를 통해 실려왔다. (뇌경색 환자는 종종 이 시간대에 응급실로 실려온다.) 환자는 오른쪽으로 두드러진 근력저하 소견이 관찰되었으며 동측으로 시야장애(반맹증)를 호소했다. 이후 몇가지 문진을 통해서 환자의 증상은 3일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후 시행한 B-CT, B-MRI에서 좌측 중뇌동맥과 후뇌동맥 영역에 커다란 뇌경색 소견이 관찰되었다. 바로 이 환자가 오늘 소개할 302아저씨였다.

 302아저씨는 그렇게 나와의 첫 인연을 맺었고 4월 신경과 근무를 시작하면서 재회할 수 있었다. 입원 후 약물과 재활 치료를 반복하면서 3월보다 근력은 꽤나 호전되었지만, 연하장애 및 시야장애는 여전했다. 연하장애 덕분에 아저씨와는 거의 매일 L-tube 빼고 넣고를 반복하면서 눈빛만 주고 받아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라뽀의 단계까지 가까워질 수 있었다. 후뇌동맥 영역에 뇌경색을 맞았으니 시야장애는 당연히 남을 수 밖에 없는 증상이었지만, 매일같이 눈이 침침하다며 안과 진료를 봐달라는 보호자의 성화탓에 안과로 컨설트 몇번 반복해서 날렸다가 불려가서 무참히 깨지기도했던 기억도 아저씨와의 잊을 수 없는 추억 중 하나다. 

 한번은 아저씨 등 뒤에 작은 물혹이 난 적이 있었다. 당연히 컨설트를 봤고 별 문제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초음파를 통해서 꼭 보고 싶다고 매일같이 나를 졸라댔고, 그 성화에 못이겨 새벽녁 몰래 초음파 기계를 빌려와서 free로 초음파 상에서 물혹 소견이 관찰되는 모습을 보여드린 적도 있었다. 추가비용이 발생하지 않도록 차트 기록엔 남기지 않을 것을 간호사들에게 부탁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에 의해서 후에 그 사실이 교수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깨질거라 생각했건만, 다행히 초음파 사진도 잘 잡혔고 환자에게 추가부담도 없었던터라 크게 혼나지는 않았었다.  

 4월의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몇몇 과를 거친 후 6월, 다시 아저씨를 만날 수 있었다. 3월 당시와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며 보호자와 함께 응급실로 내원했던 것. 전공의 선생님이 오프였던지라 뒤도 돌아볼 것 없이 당직 교수님께 다이렉트로 노티했고, 아저씨의 두번째 호스피탈 라이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뇌경색 후유증으로 입원하게 된 아저씨는 4월에 비해서 무척이나 수척해진 상태였다. 보호자와 응급실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데, 요양원에 계시던 그간에도 주욱 잘 드시지 못했다고 했다. 체중이 1/3 가량이나 줄었던 탓인지 남산만 했던 아저씨의 배는 홀쭉해져버렸고 기력없이 축 쳐진 상태였다. 그 뒤 보호자 식당에서 허겁지겁 식사를 하는데 우연히 아저씨의 보호자를 만날 수 있었고, 응급실에서보단 건강한 상태라는 말을 듣고 참 다행이라며 인사를 주고 받았다. 

 그 뒤로 아저씨의 소식을 접한 것이 바로 3일전이었다. 여느 때처럼 차트를 들고 2층부터 8층까지 뛰어가는 도중 신경과 병동의 간호사가 '선생님 302아저씨 돌아가신 것 알아요?'라는 말을 시작으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엔 하루에도 많은 사람이 생을 마감하는 병원에서 간호사가 직접 내게 부음을 전할만큼 나와 가까웠던 환자가 있었을까 궁금했다. 이런저런 설명을 듣다보니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302아저씨임을 뒤늦게 알 수 있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일주전 우연찮게 병동에서 아저씨를 마주한적 있었다. 전보다 더 수척해진 모습 탓인지 서서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는 와중에 뒤에서 누가 가운을 잡아 끄는데도 아저씨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뒤늦게 보호자가 달려와 인사를 하자, 그제서야 그 환다가 302아저씨였음을 알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 아저씨가 6월 요양원으로 전원을 갔는데 이후 지속적으로 상태가 악화되었고, 폐렴이 의심되어 재전원 왔다고 전했다. 너무 바빴던 탓에 아저씨와 길게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나중에 놀러가겠다는 말과 함께 엘레베이터를 타고 급히 그 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뒤늦게 간호사로부터 부음 소식을 듣고 바쁜 일과 시간을 쪼개서 장례식장으로 발걸음을 했다. 그곳에 남아있었던 것은 아저씨의 영정 사진과 목놓아 우는 부인뿐이었다. 영정 사진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면서 일주일전 엘레베이터 앞에서 짬을 내어 아저씨께 건강하게 잘 지내란 말을 건네지 못한게 후회스럽고 원망스러웠다. 한참은 어린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선생님 덕분에 그래도 아저씨가 건강하게 지낼 수 있었다라는 말을 전했다. 부인은 식사라도 하고 가라했지만, 아저씨께 더 잘해드리지 못한게 죄스러워 힘내시란 말과 함께 식사는 거절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병원에서 근무하다보면 적지않은 환자들과 크고 작은 인연들을 만들어가게 된다. 302아저씨도 그런 인연 중에 하나였고, 나는 그 인연을 통해서 의학 외에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환자 한명 한명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내서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은 비록 주사나 약물보다 효과는 떨어지더라도 환자 케어에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나는 환자와의 관계 형성에 있어서 한참은 부족한 의사임을 느낄 수 있었고, 동시에 학창시절부터 지겹도록 들었던 환자와의 라뽀 형성은 내게는 아직까지도 요원한 것임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by Polycle | 2009/09/24 10:11 | 일기 | 트랙백 | 덧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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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푸른마음 at 2009/09/24 10:22
저도 어느새 임상 8년차가 되었지만 환자와의 라뽀형성 문제는 언제나 쉽지 않습니다.
많이 보고, 많이 관심가지고, 많이 대화하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해답인 것 같아요.
그분의 평안을, 그리고 Polycle님께서 좋은 의사로 성장하시길 기원합니다.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9/25 14:09
답은 스스로가 찾아가는거라 생각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Commented by NePHiliM at 2009/09/24 11:17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Commented at 2009/09/24 13:0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9/25 14:11
아마 ventricle(뇌실) 속에 하얀부분을 말하시는것 같은데, 저건 정상적인 calcification(석회화)입니다. 뇌 자기공명영상 촬영 결과 정상적으로도 하얗게 나타는 부분이 몇군데 있습니다.
Commented by thinkpink at 2009/09/24 13:17
작년에 6살짜리 아들이 팔꿈치 골절을 입어서 병원에 한 열흘 입원한 적이 있었답니다.
수술해주신 주치의는 물론 레지던트샘 얼굴 보기도 참 힘들더라구요
회진때마다 아이에게 한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시고는 또 휙 가버리셨지만
분명히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올 여름엔 놀이터에서 놀다가 멀쩡하던 다른 팔을 또 부러뜨려서
외래로 그 교수님을 찾아갔는데
처음엔 얼굴을 보고도 못알아 보시더니 x-ray기록을 보고 알아보셨지요 ㅋㅋ
그리고 의외로 (?) 길고 세심하게 아이를 봐주셨습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도 친절하게 잘 해주시고
오전 진료여서 그랬는지 그때 봤던 그 지치고 시간에 쫓기는 모습이 아니었죠
단골(?) 환자라서 특별대우를 해주신걸까요? ㅎㅎㅎ

역시 생각대로 좋은 분이셨구나 했지만

정작 더 많은 위로와 관심이 필요한 입원환자에게 좀 더 시간을 할애할 수 없는 병원시스템이 약간은 안타깝게 느껴졌어요

p.s. 저도 302아저씨의 명복을 빌어봅니다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9/25 14:12
환자 1인에게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극도로 부족한 대한민국 의료현실과 시스템을 탓해야겠지요. 그래도 일선에서 노력하시는 의사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니 미래는 밝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네요. ^^
Commented at 2009/09/24 13:3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Akerus at 2009/09/24 17:46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Commented by 퍼그폴리야 at 2009/09/24 17:50
ㅠ ㅠ 저는요 산재관리 병원 정형외과 과장님 생각 나네요 ...ㅠ ㅠ
산재관리 병원 은 아무 의사나 못가는 병원 이라는거 익히 들어서 잘알고 있지만 .. ㅠㅠ
저가요 병원 건물 밖에서 자전거 를 타고 지나가는데 ㅠ ㅠ
엠피쓰리 들으며 자전거 타고 가면 위험하다고 예기 해 주시는데 ㅠ
어디 이런 의사 가 있나 .. 환자 가 엠피쓰리 음악 들으며 자전거 를 타건말건
터치 안할거 같은데 ... 따스 한 예기 한마디 가 저한테 는 감동 이었어요
ㅠ ㅠ 환자가 발톱 파고 들어서 왔는데요 예기 하니 ... 앉아 있던 의자 에서 일어나서
환자 발 앞에서 쪼그려 앉아서 발톱 봐주신 그분 ... ㅠ ㅠ 그게 몇해 전 일이지만
지금도 잊을수 없고 큰 감동으로 저의 기억속에는 남아 있네요
검은머리 파뿌리 될때 까지 잊지 못할거 같아요
Commented by freed at 2009/09/24 21:43
이 일을 계기로 더욱 더 발전한(저한테는 소중한) 폴리클님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라뽀의 중요는 정말인지 기대이상의 효과를 거두는 것 같아요.
환자 입장에서는 아프니까 모든 것(?)을 의사한테 기대는데...
그 때 의사와의 라뽀를 통해 마음이 훨씬 안정적이게 되죠.

Ps. 이게 라뽀형성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추천은 해볼게요~
단 한마디를 하셔도 '진심'을 가지고 한다면 환자역시 '진심'으로 받아들일거 같아요.
말이 되게 추상적이고, 이게 뭐하는것인지 로 들리실 수도 있겠지만,
한번 해보세요. 확실히 다르게 느껴질거에요.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9/25 14:13
저도 학생 시절엔 라뽀가 치료에 큰 효과나 있겠어...라는 생각을 했는데 의외로 환자 치료 순응도에 미치는 라뽀의 영향은 강력하다는걸 요즘 새삼 다시 깨닫고 있습니다.
Commented by 퍼그폴리야 at 2009/09/24 21:55
ㅠ ㅠ 폴리클 님 글 보며 또쓰고싶은 한마디 말이 ... ㅠ ㅠ
저가요 올해 초에 카대병원에 입원해서 다리 수술 을 받았죠
ㅠ ㅠ 그때 인턴 선생님 ... 우앙
당당히 그 인턴 선생님 이름 을 밝히 고 싶네요
김형덕 선생님 이셨어요
ㅠ ㅠ 환자가 혓바늘 때문에 먹지를 못한다고 고통을 호소하니 참 ...
이를 악물고 먹으라고 예기 를 해주시는 거에요 ㅠㅠ
두고두고 잊을수 없는 그 따스한 말 한마디 .. 그날 저녁 밥맛나게 잘먹었던 기억 ...


302호 아저씨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9/25 14:13
혓바늘에 이를 악물고라... 좋은 의미인가요? ^^;
Commented by rainblue77 at 2009/09/25 20:03
음..좋은 곳으로 가셨으면 좋겠어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가끔..이런저런 인연으로 알고 지내는 분들 중에서 부고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참 많이 착잡할 것 같아요.

환자여도 더 정이가고 더 만나고...하나의 인연으로..맺어지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아요.

특히 이번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을 것 같아요..

Commented by 미소천사 at 2009/09/30 09:03

어느 병원 경영 컨설팅 회사에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환자들이 의사에게 가장 바라는 1순위는 바로

'환자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 이었습니다.

수많은 환자들을 접하다 보면 이것 또한 어려운 일이지만.

내 앞에 있는 환자가 지금 이순간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대하신다면..

쌤은 환자들의 질병 뿐만아니라 마음까지 치유 할 수 있는 멋진 의사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번 글을 읽고 나니..

쌤의 그 마음이 너무 아름답게 보입니다.





Commented by pinkice at 2009/10/11 00:41
ICU에 있을때.. 원폭피해자로 마지막을 바라보며 입원하신 분이 있었어요.
.. 라포 형성도 잘 되었고.. 손이 많이 가는 만큼 정도 많이 들었던지라
가까운 시일내에 찾아뵌다고 했던게 생활이 바쁘다보니 점점 늦춰지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보니 4일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얼마나 죄송하던지.. 자책하면서 눈물이 나 울기도 했죠.. ㅎ
아직도 생각하면 우울하고 죄송하지만.. 좋은 곳 가셨을거니 마음을 달래고 있어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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