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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가 의사에게 원하는 것

 
흉수(pleural effusion)와 돼지꼬리(pigtail) 모양 도관 (출처)

 선배의 부탁으로 지난주부터 하루에 한번씩 흉수 pigtail aspiration(흡입)을 시행하는 환자가 한명있다. 50대 중반쯤 되보이는 아저씨로 오른쪽 무릎의 화농성 관절염으로 관절경 수술을 시행한 환자였는데, 대학병원에서 전원되기 전부터 양쪽으로 pigtail(돼지꼬리 모양의 관)을 박고 매일마다 흉수 흡입을 했던 모양이었다.

 Pigtail aspiration은 수많은 병원 일 중 지겹지만, 나름 쉬운(?) 처치 중 하나다. 흉강에 박아놓은 관을 통해서 주사기로 흉수를 빼주기만 하면 되는 일인지라, 의사면허를 소지하고 있고 주사기를 당길만한 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다. 이런 'pigtail aspiration' 작업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환자의 흉강 속에 차있는 흉수이 양이다. 단순작업이기 때문에 흉수의 양이 적다면 주사기 몇번 놀려주면 모든 작업이 종료되지만, 흉수가 1000ml를 넘어선다면 그때부턴 주사기와 함께 시작되는 무한 노동의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

 선배의 부탁으로 pigtail aspiration을 하게 된 그 환자 역시 처음엔 흉수의 양이 만만치 않았다. 마음 속에서 교과서를 비우고 아무 생각없이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일해야하는 대한민국 인턴이라지만 환자가 호소하는 호흡곤란 증상과 관련하여 가슴사진은 어떤 모습일지 너무나 궁금했기에 몰래 chest 사진을 열어 보았다. 새하얀 폐 사진을 보면서 환자는 그간에 호흡곤란으로 얼마나 고생했을지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곧바로 시행한 aspiration, 양쪽 lung에서 각각 1L 정도의 흉수가 제주도의 간헐천처럼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그렇게 3일을 뽑아냈더니 흉수의 양이 차츰 줄어들고 줄어든 흉수의 양만큼 환자의 호흡양상도 좋아졌다. 3~4일 정도 환자를 매일 만나다 보니 어느정도 라뽀도 쌓이게 되고 지루한 aspiration 시간동안 야구(SK-기아전) 등 몇가지 이야기도 주고 받으며 보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아저씨는 자신이 왜 폐에 관을 박고 있는지, aspiration은 왜 하는지, 그리고 그것과 호흡양상의 호전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물었다.
 내가 그 환자의 주치의가 아니였기에 자세한 이야기는 해줄 수 없었지만, 기본적인 설명정도는 괜찮을듯 싶어서 그림을 그리며 몇가지 설명해드렸다. 대충 그린 그림에 너무나 간단한 설명이었지만(그래서 이해하기에 충분치 못했을수도 있지만) 아저씨는 너무나 좋아했다. 아저씨에게 왜 주치의 선생이나 담당 교수님께 물어보지 않았냐고 묻자, 병원일 때문에 늘 너무나 바쁜 분들이고 회진 때 잠깐 만나는 것 외엔 얼굴보기 힘든 사람들이라 질문은 커녕 대화조차 나누기 어려웠다고 답했다. 마음 한켠이 씁슬해졌다. 늘 옆에서 지켜보았던 담당의나 전공의들의 잠도 못자고 식사조차 제대로 못하는 바쁜 생활, 그리고 의사에게 말을 건네는 것조차 힘들었다는 그 환자와 곁에서 맞장구치는 같은 병동 입원 환자들. 어느 쪽도 옹호하지 못하고 그 한가운데 애매하게 걸쳐있는 마음탓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는 aspiration을 위해 아저씨를 찾을 때마다 같은 병동 환자들에게 '잘생기고 친절한 어린 의사 선생님'이라며 나를 소개하고 사위삼고 싶다며 자랑했다. 그때마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며, 수줍음에 견딜 수 없어 빨리 aspiration을 하고 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후론 되도록이면 그 병동 입원 환자들이 운동 나가고 없는 시간에 방문하고 있다. 2주정도 그렇게 aspiration을 하다보니, 이제는 흉수도 하루 100ml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데다 아저씨의 호흡양상도 많이 좋아졌다. 아저씨는 무척이나 고마워하면서, 오늘은 일하다 힘들면 몰래 먹으라며 양갱까지 하나 가운 주머니에 챙겨 넣어주셨다. (비록 내가 좋아하는 간식거리는 아니었지만;) 병원에 고용되어 월급받고 일하는 처지라 당연히 해야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고마움을 표시하는 아저씨의 그 작은 마음이 너무나 감사했다.   

 의사라면 누구나 잠깐의 짬만 낸다면 쉽게 전할 수 있는, 하지만 환자나 보호자는 때론 그것을 듣지 못해서 혹은 병원이나 의사의 무게감에 짓눌려서 설명을 요구하지 못했던 이야기들. 환자와 의사간의 소통의 부족으로 발생하는 이러한 갭이 여느 병원이나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이는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못한 의사의 잘못일 수도, 충분한 설명을 요구하지 못했던 환자의 잘못일 수도 있다. 더불어 겉으론 더 많은 환자의 유치를 위해 친절 병원을 표방하면서도 안으론 주치의나 간호사에게 더 많은 일을 하도록 부담을 전가하는 대한민국 종합병원의 모순일 수도, 근본적으론 개떡같은 대한민국 의료정책의 오류일 수도 있다. 

 아직  걸음마 단계의 의사인 내가 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책을 내어놓을 자신은 없다. 허나 교정해야 할 문제점이 존재함은 분명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본다. 의외로 대답은 간단할런지도 모른다. 설령 현재의 내 자신이 환자들에게 기본적인 술기로 도움을 주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더라도, 그 작은 힘이 차곡차곡 쌓여서 언젠가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기에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다.

by Polycle | 2009/08/11 15:48 | 일기 | 트랙백(1) | 덧글(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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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xissy's me2DAY at 2009/08/11 19:23

제목 : xissy의 생각
며칠 병원에 있어보니 이런 의사 선생님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도 담당교수님께 어머니의 정확한 병명 조차 듣지 못했다. 10초 만에 끝나는 회진, 결과는 마냥 기다리라는 말 밖에 들을 수 없고. 그걸 감사하다고 연신 인사를 하는 아버지를 보며 답답함을 느꼈다....more

Commented at 2009/08/11 16:1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8/11 23:46
감사합니다. 헌데 대성은 트로트 가수? ;;;
Commented at 2009/08/11 16:1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8/11 23:50
수많은 환자들을 진료하다보니 기계적으로 변할 때가 저도 종종 있습니다. 월급은 적지, 일은 힘들지, 환자는 많지... 늘 경계하려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는게, 역시나 나도 그저 그런 사람 중에 하나구나 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때론 의사로써 사명감이 부족한게 아닌가 느끼기도 하구요. 이에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인력증가나 수급인상 등이 아닌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을 한바탕 뒤접어 놓아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현재와 같은 시스템하에서는 답이 안나옵니다. 정말.
Commented by NePHiliM at 2009/08/11 16:21
힘내세요 ^^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8/11 23:50
요새는
-네피

안넣으시네요? ^^
Commented by NePHiliM at 2009/08/12 10:06
-_-; 자꾸 사람들이 물어봐성 걍 빼고살아요
Commented by 친절한 누나씨 at 2009/08/11 16:27
오늘 포스팅은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네요.
폴리클님 같은 의사 분들이 많아졌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8/11 23:51
감사합니다. 늘 보시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포스팅은 덧글을 남기시지 않으신가...생각해봤습니다. 헤헷! (농담입니다.)
Commented at 2009/08/11 17:2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8/11 23:52
오호, 한번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문답은 두번째 받아보네요. 의외로 적게받았답니다. ^^
Commented by 먹보 at 2009/08/11 17:30
사람은 따뜻한 관심을 원합니다..더구나 병원은 몸이 아프기 때문에 위안을 받고 싶은 곳인데
환경이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라 폴리클님 말처럼 당연한 일인데도 어려울 뿐이죠..
환자분의 마음을 읽었군요ㅋ 이러면 어딜가나 사랑받습니다 ㅋㅋ
잘 생기고 친절하고 어린의사 폴리클님 곧 여친이 생기겠네요ㅋㅋㅋ 만세!~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8/12 00:24
친절하다라... 너무 극찬이신걸요. 아마 병원에서 절 만나시면 생각이 달라지실지도. ^^
Commented at 2009/08/11 17:3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8/12 00:24
감사합니다.
Commented at 2009/08/11 17:4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키세츠 at 2009/08/11 17:55
아름다운 소통의 장이군요.

저도 그때 응급실에 실려갔을때 이런 의사분을 만났었어야 하는데........ 쩝...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8/12 00:24
저도 응급실에선 변신(?)을 장담못하는지라... ^^ 그래도 친절히대하려 노력한답니다.
Commented by organizer™ at 2009/08/11 18:24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은 항상 -- 언제나 -- 바쁘더군요.....................

뭘 물어 보는 것은 고사하고, 어떤 결과가 나왔을 때, 뭔가가 필요할 때도 '설명'을 제대로 듣는 것은 불가능했었습니다. [뭐, 의사들도 다 바쁘니 한가하게 붙잡아 놓을 수는 없겠지요..]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8/12 00:27
아, 그게 정말 딜레마입니다. 뭐, 의사니 의사 옹호하겠지라 생각하시느 분들도 있겠지만. 정말 어지간히 무디고 착한 사람 아니면...거의 그렇게 변하더군요.
Commented at 2009/08/11 18:2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soup at 2009/08/11 19:49
공감합니다:) 이를테면 아무리 시간에 쪼들리고 자세히 풀어 설명하기 귀찮다고 해도, 전문용어를 여과없이 그대로 써가며 설명하는 전공의쌤들을 보면 좀... 물론 좋게 풀어서 설명하면 뭉뚱그리지 말고 정확히 설명해달라고 요구하는 환자분들도 있고; 그 사이의 적당한 지점의 위치가 참 미묘한 듯 해요;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8/12 00:28
미묘하죠. 얼마나 어떻게 어디까지 설명을 해야하는 것인가. 때론 너무 적게 때론 너무 많이 설명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으니...bluesoup님도 옆에서 지켜보면서 참 많은걸 느끼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Commented at 2009/08/11 21:3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8/12 00:33
pong님 그렇군요. ^^ 실습 재미있게 하시고 궁금한건 언제든지 물어보세요. 요새 저희 병원에도 실습학생 나오는데, 잘 모르는 저한테 이것 저것 묻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답니다. ^^
Commented by pathology at 2009/08/11 22:00
전 포스트의 댓글들 보며 씁쓸했던 마음이..
조금 달래지는 포스트네요...
폴리클선생님 너무 애쓰지 말아요...ㅎ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지만...
무튼 힘내요~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8/12 00:33
네, 감사합니다. ^^
Commented by rainblue77 at 2009/08/12 00:19
환자분의 마음이 이해가 되요.
전에 엄마가 입원하셨을 때...저는 학교 갔다 오느라고...
저녁 무렵에 병원에 갔는데...
거의 밤 11시경쯤에 주치의 선생님이 오셔서...
세심하게 이것저것 물으시고 하시던게..
그때 감동이랄까..
그 시간이 자고 싶고 얼마나 피곤할까...그게 느껴져서..
그 선생님도 피로에 찌들려 보였는데..
조근조근한 목소리로...그렇게 해주시던데..참 고마웠어요.
가끔은..눈높이에서 그렇게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많이 피곤하시겠지만..
아픈사람의 입장에서는...불안한 마음도 크고..궁그한 마음도 크니까....
환자의 입장이었습니다..^^

이런글 보고 나면 마음이 훈훈해져요..^^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8/12 00:34
감사합니다. rain님도 병원에서 고생하셨군요. 어머님이 건강하기길 기원합니다.
Commented by byontae at 2009/08/12 00:41
Polycle님 이야기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런 훈훈한 이야기들이 모이다 보면 결국 세상이 바뀌는 것 아니겠습니까? 항상 응원하고 있습니다.
Commented by 달빛고양 at 2009/08/12 23:22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것은 설명을 잘 해주는것이죠, 케어도 중요하고 ㅋㅋ병원측은 매일 일어나는 일이고 어차피 상관없는 정보라고 자체 판단하지만 환자 입장에선 그게 또 아니거든요 ㅋㅋ역쉬...설명은 중요하다눈~
Commented by at 2009/08/16 23:49
참 훈훈한 장면이네요. ^ㅅ^ 저도 가끔 병원을 가면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의사 선생님이나 간호사의 한 마디에 마음이 울컥 하기도 한답니다. 몸의 통증도 통증이지만, 내 고통과 원인과 이유, 앞으로 어떻게 치유될 것이라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정말로 절실한 것 같아요. polycle님은 정말 훌륭한 의사선생님이세요! ^^
Commented by 윤명현 at 2009/09/23 10:02
폴리클님의 작은 움직임 작은 발걸음이 우리 의료계를 변화시킬거라 믿어요^^...힘든과정 잘 마치시고 훌륭한 의사선생님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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