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8월 11일
환자가 의사에게 원하는 것

선배의 부탁으로 지난주부터 하루에 한번씩 흉수 pigtail aspiration(흡입)을 시행하는 환자가 한명있다. 50대 중반쯤 되보이는 아저씨로 오른쪽 무릎의 화농성 관절염으로 관절경 수술을 시행한 환자였는데, 대학병원에서 전원되기 전부터 양쪽으로 pigtail(돼지꼬리 모양의 관)을 박고 매일마다 흉수 흡입을 했던 모양이었다.
Pigtail aspiration은 수많은 병원 일 중 지겹지만, 나름 쉬운(?) 처치 중 하나다. 흉강에 박아놓은 관을 통해서 주사기로 흉수를 빼주기만 하면 되는 일인지라, 의사면허를 소지하고 있고 주사기를 당길만한 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다. 이런 'pigtail aspiration' 작업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환자의 흉강 속에 차있는 흉수이 양이다. 단순작업이기 때문에 흉수의 양이 적다면 주사기 몇번 놀려주면 모든 작업이 종료되지만, 흉수가 1000ml를 넘어선다면 그때부턴 주사기와 함께 시작되는 무한 노동의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
선배의 부탁으로 pigtail aspiration을 하게 된 그 환자 역시 처음엔 흉수의 양이 만만치 않았다. 마음 속에서 교과서를 비우고 아무 생각없이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일해야하는 대한민국 인턴이라지만 환자가 호소하는 호흡곤란 증상과 관련하여 가슴사진은 어떤 모습일지 너무나 궁금했기에 몰래 chest 사진을 열어 보았다. 새하얀 폐 사진을 보면서 환자는 그간에 호흡곤란으로 얼마나 고생했을지 상상조차 되질 않았다. 곧바로 시행한 aspiration, 양쪽 lung에서 각각 1L 정도의 흉수가 제주도의 간헐천처럼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그렇게 3일을 뽑아냈더니 흉수의 양이 차츰 줄어들고 줄어든 흉수의 양만큼 환자의 호흡양상도 좋아졌다. 3~4일 정도 환자를 매일 만나다 보니 어느정도 라뽀도 쌓이게 되고 지루한 aspiration 시간동안 야구(SK-기아전) 등 몇가지 이야기도 주고 받으며 보낼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아저씨는 자신이 왜 폐에 관을 박고 있는지, aspiration은 왜 하는지, 그리고 그것과 호흡양상의 호전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물었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는 aspiration을 위해 아저씨를 찾을 때마다 같은 병동 환자들에게 '잘생기고 친절한 어린 의사 선생님'이라며 나를 소개하고 사위삼고 싶다며 자랑했다. 그때마다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며, 수줍음에 견딜 수 없어 빨리 aspiration을 하고 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후론 되도록이면 그 병동 입원 환자들이 운동 나가고 없는 시간에 방문하고 있다. 2주정도 그렇게 aspiration을 하다보니, 이제는 흉수도 하루 100ml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데다 아저씨의 호흡양상도 많이 좋아졌다. 아저씨는 무척이나 고마워하면서, 오늘은 일하다 힘들면 몰래 먹으라며 양갱까지 하나 가운 주머니에 챙겨 넣어주셨다. (비록 내가 좋아하는 간식거리는 아니었지만;) 병원에 고용되어 월급받고 일하는 처지라 당연히 해야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고마움을 표시하는 아저씨의 그 작은 마음이 너무나 감사했다.
의사라면 누구나 잠깐의 짬만 낸다면 쉽게 전할 수 있는, 하지만 환자나 보호자는 때론 그것을 듣지 못해서 혹은 병원이나 의사의 무게감에 짓눌려서 설명을 요구하지 못했던 이야기들. 환자와 의사간의 소통의 부족으로 발생하는 이러한 갭이 여느 병원이나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이는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못한 의사의 잘못일 수도, 충분한 설명을 요구하지 못했던 환자의 잘못일 수도 있다. 더불어 겉으론 더 많은 환자의 유치를 위해 친절 병원을 표방하면서도 안으론 주치의나 간호사에게 더 많은 일을 하도록 부담을 전가하는 대한민국 종합병원의 모순일 수도, 근본적으론 개떡같은 대한민국 의료정책의 오류일 수도 있다.
아직 걸음마 단계의 의사인 내가 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책을 내어놓을 자신은 없다. 허나 교정해야 할 문제점이 존재함은 분명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본다. 의외로 대답은 간단할런지도 모른다. 설령 현재의 내 자신이 환자들에게 기본적인 술기로 도움을 주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더라도, 그 작은 힘이 차곡차곡 쌓여서 언젠가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기에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다.
# by | 2009/08/11 15:48 | 일기 | 트랙백(1) | 덧글(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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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xissy의 생각
며칠 병원에 있어보니 이런 의사 선생님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도 담당교수님께 어머니의 정확한 병명 조차 듣지 못했다. 10초 만에 끝나는 회진, 결과는 마냥 기다리라는 말 밖에 들을 수 없고. 그걸 감사하다고 연신 인사를 하는 아버지를 보며 답답함을 느꼈다....more
-네피
안넣으시네요? ^^
폴리클님 같은 의사 분들이 많아졌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환경이 사람을 지치게 하는지라 폴리클님 말처럼 당연한 일인데도 어려울 뿐이죠..
환자분의 마음을 읽었군요ㅋ 이러면 어딜가나 사랑받습니다 ㅋㅋ
잘 생기고 친절하고 어린의사 폴리클님 곧 여친이 생기겠네요ㅋㅋㅋ 만세!~
저도 그때 응급실에 실려갔을때 이런 의사분을 만났었어야 하는데........ 쩝...
뭘 물어 보는 것은 고사하고, 어떤 결과가 나왔을 때, 뭔가가 필요할 때도 '설명'을 제대로 듣는 것은 불가능했었습니다. [뭐, 의사들도 다 바쁘니 한가하게 붙잡아 놓을 수는 없겠지요..]
조금 달래지는 포스트네요...
폴리클선생님 너무 애쓰지 말아요...ㅎ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지만...
무튼 힘내요~
전에 엄마가 입원하셨을 때...저는 학교 갔다 오느라고...
저녁 무렵에 병원에 갔는데...
거의 밤 11시경쯤에 주치의 선생님이 오셔서...
세심하게 이것저것 물으시고 하시던게..
그때 감동이랄까..
그 시간이 자고 싶고 얼마나 피곤할까...그게 느껴져서..
그 선생님도 피로에 찌들려 보였는데..
조근조근한 목소리로...그렇게 해주시던데..참 고마웠어요.
가끔은..눈높이에서 그렇게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많이 피곤하시겠지만..
아픈사람의 입장에서는...불안한 마음도 크고..궁그한 마음도 크니까....
환자의 입장이었습니다..^^
이런글 보고 나면 마음이 훈훈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