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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임산부

 
 임산부가 응급실에 내원하는 경우, 다리에 오금이 저린다. 그나마 임신 2,3기에 오는 환자들이야 어느정도 약물 사용에 여유 폭이 크지만 임신 1기, 즉 태아 장기 형성에 중요한 시기에 예사롭지 않은 증상을 주소로 응급실을 방문하는 경우엔 진료 후 스테이션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긴 사유의 시간을 거치면서 책을 뒤져보기도 하고, 드러그인포에 약물 정보를 들추어보기도 하지만 늘 결론은 과장님과 상의 후 결정되는터라 요즘은 귀찮은탓인지 임산부의 경우 싱글만 달아놓고 상의드리기도 한다.

 참 독특한 환자를 한명 만났다. 두통과 복통을 주소로 내원했던 20대 여자였는데, 침대 옆에는 자그마한 아기가 쌔끈쌔끈 잠들어 있었다. 늘 그렇듯 LMP 및 임신 가능성에 대한 질문부터 던졌고 여자는 그럴 가능성이 적다며 검사를 refuse했다. 혹시나 모유수유 중은 아닐까 싶어 물었지만 그 역시 아니라고 했다. 1시간동안 10여명이 넘는 환자가 밀어닥쳤던지라 잠시 자리를 비운 보호자를 만나볼 수는 없었고 그렇게 각기 증상에 대한 처방만 내린채 또다른 환자를 진료하러 나섰다.

 치료가 중반즈음 이루어졌을까. 갑자기 보호자가 다가와선 현재 임신 7주인데 약물을 투여해도 문제가 없겠냐는 것이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찌릿한 전율이 돋기 시작했다. 나를 비롯해 약물 투여전 간호사도 재차 임신 및 모유수유 가능성을 물어봤지만, 역시나 환자는 가능성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뜬금없이 이게 웬 날벼락인가. 일단 간호사에게 약물 투여 keep을 지시하고 현재 투여 중인 약물에 대한 임산부 안전성을 찾아보았다. 다행히 하나를 제외하곤 큰 문제가 없는 약물이었고(그 하나도 위험성과 이득을 고려하여 사용가능한 약물이었다.) 다시금 환자와 보호자에게 찾아가 임신 가능성부터 환자 상태 및 향후 치료계획까지 설명드렸다. (환자는 한달여 전에도 어지러움으로 응급실을 내원한 기왕력이 있었는데, 당시 preg test 결과는 negative였다. 물론 응급실에서 소변을 통해 시행하는 임신 반응 검사는 7주까지는 음성으로 나올 확률도 있다고 한다.)

 수액을 중단하니 얼마지나지 않아 어느정도 호전되었던 환자의 증상은 다시금 재발하였고 증상을 잡기 위해 타이레놀 복용을 지시했다. 하지만 여전히 증상 호전은 없었고, 보호자에게는 임신으로 인한 약물 투여의 한계에 대해 설명하였으며 더욱 자세한 검진이나 치료를 원하시면 산부인과 진료를 보는 것이 좋겠다 설명드렸다. 보호자는 이에 수긍하고 연고지에 가까운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보고 싶다하여 소견서를 작성하여 퇴원시켰다. 하지만 퇴원하는 길에 다시금 증상이 재발하여 환자는 쓰러졌고 도저히 갈 수 없다며 여기서 치료해줄 것을 요구했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환자는 mental이 약간 떨어지는 상태였지 않았나 싶다. 간호사도 라인을 잡고난 후, 내게 와서 비슷한 말을 넌지시 했는데 진료 당시 환자는 묻는 질문에 똑똑히 잘 대답했던터라 아닐꺼라 생각했다. 여튼 그렇게 하룻밤을 응급실에서 보낸뒤, 다음날 환자는 산부인과 진료를 보았다. 환자의 상태를 좀 더 면밀히 파악하지 못한 당직의인 나에겐 예상대로 불호령이 떨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다지 실수가 있진 않았다 생각하지만, 보호자에게 다시금 임신 가능성 여부를 물어보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은 남았다. 허나 당시 상황이 환자가 밀려드는터라 무척이나 바뻤고 그 환자에게만 집중하기엔 심신의 상태가 썩 좋은 상황도 아니었다.

 저녁 7시부터 시작한 근무, 1시간 간격으로 check했던 체온은 38.1도까지 올랐고, 눈에선 불이난 느낌이었으며 온 몸이 깨질듯이 아펐다. 거기에 유난히 많았던 환자, 질 떨어지는 보호자, 애매모호한 환자들이 겹쳐 짜증게이지는 이미 풀까지 차올랐다. 진료 도중에 너무 아퍼서 주사 진통제를 맞았지만 눈에띄는 증상의 호전은 없었고, 그마저도 밀려드는 환자통에 반정도만 맞다가 주사바늘을 뺄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오프라 한 숨 푹자고 난 지금, 어제보단 좋아졌지만 아직도 60%정도 밖에는 회복되지 않은 느낌이다. 거기에 과장님으로부터 혼까지 났으니 기분도 최악이다. 심지어는 의료실비라도 확 올려서 응급실오는 환자라도 줄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정말 인턴 입사 후, 최악의 날이었다, 오늘은.

by Polycle | 2009/06/09 23:59 | 일기 | 트랙백(1) | 덧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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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Life Is Alwa.. at 2009/06/10 13:32

제목 : 환자가 임신인 줄 모르고 금기약을 처방했다면?
임산부의 경우 태아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약물의 투여를 꺼리게 됩니다. 이미 태아에 유해하거나 기형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지 않은 약물이라고 하더라도 가능한 피하려고 하게 마련이죠. 따라서 의사의 입장에서는 가임기 여성을 진료할 때는 임신의 가능성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가임기 여성을 대상으로 임신 반응 검사를 모조건 시행할 수는 없는 것이고, 환자 본인이 임신인 줄 모르고 있었다면 임신인 상태에서 약물이 ......more

Commented by 고은새 at 2009/06/10 00:18
토닥 토닥~~ 힘들었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하네요. 근데 글 보면서 혼자 킥킥 웃었어요. 이궁 ㅠㅠ
힘내세요 !!!
Commented by 공룡사랑 at 2009/06/10 00:22
애매한 나이의 여자 환자에게 임신여부 물어봤다고 버럭버럭 화내는 글을 다른 곳에서 보고
폴리클님의 글을 보노라니 "정말 어째야 하는거냐" 라는 생각이 드네요.
힘내세요. 가끔은 우리나라 보호자들처럼 막 나가는 나라가 있나 궁금해지긴 해요.
외국에서 병원을 가 본 적이 없어서...응급실도 열악하긴 하지만요.
Commented by rainblue77 at 2009/06/10 01:23
많이 힘드셨겠어요..

임신이 아니라고 해놓고 갑자기 7주 되었다고 하니..

놀라기도 하고..황당하기도 하고...뭐라 말로 표현하기 참 그런 기분이셨겠어요.

더구나 과장님께 혼까지 나셨으니..

기분이 좋고 몸도 마음도 편해야 얼른 나으실텐데..

힘내세요~!!
Commented at 2009/06/10 01:2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9/06/10 01:3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9/06/10 01:4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draco21 at 2009/06/10 02:00
.... 병을 알아서 키우는 환자였군요. -_-: ... 에구 밉상.. -_-:
그나저나 빨리 몸이 좋아지셔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힙내시길.. T.T
Commented by 유시 at 2009/06/10 09:09
ㄷㄷㄷ
힘들어보여요;;
고생 많으시네요 폴리클님 ㅎ_ㅎ;;
Commented at 2009/06/10 09:2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NePHiliM at 2009/06/10 10:28
힘내세요 ;ㅁ;
-네피
Commented by HARU봄 at 2009/06/10 11:20
힘내셔요~ 빨리 쾌차하시길 빌께요
Commented by 아나로즈 at 2009/06/10 13:09
몸도 아프신데 힘든 응급실 근무라니...고생 많으십니다.
polycle님이 환자를 정말 열심히 보셔서 몸이 남아나지 않는가봐요;

그 임신 문제는 저도 초반에 응급실에서 툭하면 잊어버려서 간호사들이 노티해주지 않으면 큰일날 뻔 한적이 좀 있었죠..다행히 한 번도 임신한 사람은 없었지만...;(아예 산과적 문제로 응급실 찾아온 환자를 제외하면요)
Commented by Hwan at 2009/06/10 13:31
모든 가임기 여성에게서 임신반응검사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증상이 임신과 전혀 무관하고 진단 과정에 임신 여부가 상관이 없는 경우(예를 들어 팔다리의 외상)에는 임신 검사가 꼭 필요하지는 않겠지만, 이 경우에라도 임신 가능성을 본인에게 확인하고, 앞으로 시행할 검사나 투약이 임신일 경우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임신 반응 검사를 하지 않을 것인지 본인 의사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 내용을 의무 기록에 남겨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죠.

하지만, 복통이나 오심과 같이 임신하고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 증상에서는 본인이 부인하더라도 특정 질환을 R/O하는 진단 과정의 하나이기 때문에 임신 반응 검사를 반드시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임신 가능성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되는 가임기 여성(예를 들어 40대 이상이거나 10대 중반 이하의 나이, 성직자 등)이 pitfall이 될 수 있습니다.

예전에 toxicology의 대가인 Dr. Goldfrank(본인 이름의 교과서가 있으니 대가겠죠 ^^)가 내한해서 응급의학에 관한 전반적인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강조한 두가지가 임신 검사와 thiamine이더군요. Thaimine은 glucose 섭취가 오랫동안 안된 alcoholics 등에서 상당히 중요할 수 있죠. 이 두가지를 강조한 것은 어떤 경우에라도 환자에게 해가 안되고, 가격이 싸고, 경우에 따라 결정적인 조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좋은 경험이 되셨으리라 생각하며, 힘든 근무 중에 아프셔서 힘드실텐데 어서 쾌유하시기 바랍니다.
Commented by 루나리나 at 2009/06/10 18:23
밸리에서 보고 왔습니다.
여담이지만 전 결혼하기 전에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는데요..
간호사 : 임신 가능성 있으세요?
저 : 없어요 -_-
간호사 : 마지막 생리일은요?
저 : 어제요!
간호사 : 아;;;

아예 문진을 할 때 마지막 생리일부터 물어보는게 여러모로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Commented by 히라케 at 2009/06/11 08:42
자기몸이 아파도 남의병을 먼저 고쳐줘야하는거군요.
빨리 나으시길 바래요
Commented by 여왕님 at 2009/06/11 12:26
힘들면 펑펑 울어버리세요. 그러면 좀 마음이 풀려요.
저도...많이 울어요...ㅎ
아자아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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