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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붙은 짜장면의 행복

 
 주말 입원 환자도 많았고, 오프를 다녀오는 사이 할 일도 산더미처럼 쌓여있어 하루 웬 종일 발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열심히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오전 7시 50분부터 시작된 회진을 시작으로 9시 반부터는 퇴원차트 정리, 오더와 컨설트를 내고나니 금새 11시 반이 되었다. 마침 아침도 거른터라 출출하던 찰나, 인턴 동료 형님과 함께 짜장면을 시켜먹기로 결의를 했다.

 늘상 중국집에 배달요리를 주문할 때마다 짜장면보다는 볶음밥을 선호했던 나였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유난히 귓가에 맴도는 짜장신의 유혹때문에 과감히 짜장면을 먹기로 결단을 내렸다. 평소 짜장만 시켜먹던 동료 형은 예상과는 다르게 볶음밥을 주문했다. 이 선택이 잠시 뒤, 우리 두사람의 희비를 어떻게 엇갈리게 만들지 알지 못한채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배고파송'을 부르며 간절히 두손모아 음식을 기다렸다.

 주문 2분뒤, 과장님께 급한 연락이 왔다. 오전에 취소되었던 tapping를 죽어도 지금해야겠으니 지금 당장 병동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주말 오프동안 간만에 만난 동기들과 무리한 술자리를 가졌고 일요일 새벽 ER 콜을 네번이나 받았기에 월요일 오전에는 회진 끝나면 무슨 일이 생기든 반드시 휴식을 가질거라 마음 속으로 그렇게 다짐했건만, 나의 당찬 그 바램은 과장님의 tapping 선언으로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오전중에 tapping이 예정되어 있던 그 환자 부모를 조금 꼬드겨서 일부로 저녁에 하게끔 꼼수도 썼지만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tapping을 마치고 병동에서 차트 내려야 하니 퇴원 정리 좀 빨리해달라는 부탁에 그 일마저 처리하고 나니 시간은 이미 오후 1시를 넘어섰고 쓸쓸히 계단을 통해 숙소로 향하던 찰나 삽십만년전에 시켰던 짜장면 생각이 갑작스레 떠올랐다. 그 즉시 신발에 터보엔진을 장착하고 숙소로 칼루이스보다 빠른 속도로 뛰어갔다. 하지만 이미 짜장면은. 이미 내 짜장면은. 이미 사랑스러운 그 녀석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짜장면에게 CPR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미 불어터져 눌러붙어버린 면발과 차갑게 식어버린 짜장. 하필이면 동료 인턴 형이 간짜장을 시킨 탓에 짜장과 면은 분리되어 왔고, 그렇게 그 둘은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정말 이 형님은 눈치 꽝이다. 하필이면 평소 안시키던 간짜장을 시키다니,) 젓가락으로 면을 콕 찝어보니 꽤나 깊숙히 박혔고, 맛이나 보자는 생각으로 면을 들어올린 순간 거대한 밀가루 덩이가 그릇 위로 떠올랐다. 이것은 TV 의학 드라마에서나 보던 말라붙은 짜장면, 그 자체였다. 순간, 감동과 번뇌가 교차했다. 하지만 의사로써 말라붙은 짜장면을 경험해보았다는 짜릿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점심은 어떻게 하지, 젠장'의 짜증이 밀려왔다.

 그래도 이대로 점심마저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 동료와 10분 토론 끝에 그 말라붙은 면과 식어버린 짜장을 입에 넣어보기로 했다. 면을 한입 베어먹고 짜장을 한 입 마시고 다시 면를 베어먹고 짜장을 먹는 작업을 반복했다. 그렇게 10여차례 엽기적인 섭식을 끝내고서야 한 그릇의 짜장면을 모두 비울 수 있었다. 입에는 덕지덕지 짜장 범벅이 되고 말라붙은 면과 짜장 탓에 구강부터 식도까지 모조리 말라붙어 옆에 있던 유통기한과 성분을 알 수 없던 물과 비슷한 액체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도 맛은 좋았다. 배가 고팠던 탓이었던걸까. 세상 그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었고 회식자리에서 먹는 고급 일식요리나 양식 요리만큼 맛있는 한끼 식사였다. 너무 급하게 먹은 탓인지 체끼가 이직까지 남아있지만.

 짜장면을 먹고 나서 다시 중환자실로 향했다. 오늘도 10여차례 시도해도 들어가지 않는 L-tube 탓에 땀을 범벅으로 흘리며 고생하고 있지만 세상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는 짜장면을 먹은 탓인지 포만감을 동반한 행복감에 평소같이 짜증나지도 않는다. 비록 다른 이들에겐 말라붙은 맛없는 짜장면 한 그릇일지 모르겠지만 빠쁘게 일한 뒤 먹었던 나에겐 아마도 생애 최고의 짜장면이 아니었을까. 

by Polycle | 2009/05/25 17:20 | 일기 | 트랙백 | 덧글(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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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9/05/25 17:2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5/28 01:32
오랜만이시네요. 요새도 노래방에?
Commented at 2009/05/25 17:3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5/28 01:32
짧은 시간이나마 고생해야죠. ^^
Commented by 위장효과 at 2009/05/25 17:41
불어터지다못해 한 덩어리가 된 짜장면을 먹어보지 못한자, 인턴의 고생을 논하지 말지어다...이지요.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5/28 01:33
한 덩어리 짜장면 베어먹어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요즘도 가끔 그러실듯?
Commented by 샛별 at 2009/05/25 17:55
눌러붙은 짜장면도 아무거리낌 없이 먹을줄 알아야 진정한 식도락가의 길을 걸을수 있게됩니다(??)


...는 반 진심 반 훼이크고, 으앜ㅋ저런 짜장면 볼때마다 제 마음이 아파요 ㅠㅠ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5/28 01:33
다음부턴 밥류로 시켜야겠습니다.
Commented by 공보3년차 at 2009/05/25 19:30
인턴이시군요..

앞으로 천국의 10개월이 지난 후 지옥의 4년이 웰컴 투 헬~~~로 시작되시겠군요.
4년차 초까지는 짜장 또는 짬뽕을 시킬때 면보다는 짜장밥 또는 짬뽕밥이 진리라는 걸 깨달아 가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의국 가까이 있는 전자렌지의 위치도...

건강하십시오. 인턴은 체력=실력입니다.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5/28 01:33
알려주신 두가지 진리 마음 속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Commented by great surgeon at 2009/05/25 22:03
정말 한번씩 짜장면이 아주 땡길때가 있기마련이죠^^

사진으로만보면
아주 먹음직스러워보이는 짜장면인데...
글을읽어보니 한낫밀가루덩이에 불과하지않네요ㅋㅋ
1시가되도록 한끼도 못드시고 뛰어다니시다니
정말 정신력으로 버텨야만살아갈수있는 세계ㅡㅡ

지금은 속 좀괜찮으세요?
안그래도 식어버린 짜장면을 급하게드셨다니ㅜㅜ
생애최고의 짜장면..
은근히 먹어보고싶네요ㅋㅋㅋ
저녁은 어떻게 드셨을지..^^;

배고파송 너무웃겼어요 도대체 어떤노래죠?^^
짜장면에게 CPR...ㅋㅋㅋㅋㅋㅋㅋ
Polycle님의 언제봐도 탁월한 언어구사능력에
박수를보냅니다^^*_
아, 인턴동료분의 굿초이스볶음밥선택에두요^^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5/28 01:34
그래도 요즘은 야식을 많이 먹은 탓인지 살은 더 불어나는걸요.
Commented by 친절한 누나씨 at 2009/05/25 23:27
아후... 침나와요~ ㅜ.ㅜ 이시간에 먹으면 답 안나오는데.. 크흑...
자장면에게 CPR은 오늘의 베스트!!!!!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5/28 01:34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rainblue77 at 2009/05/26 00:28
가끔은 그런 일상에서 생각지도 못한 행복?이랄까 이런 것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잘 챙겨드셔야 할텐데..

많이 부실하게 느껴지네요.

체기는 좀 어떠신지...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5/28 01:34
부족한 것은 늘 야식이 챙겨주지요. ㅎㅎ
Commented by AyakO at 2009/05/26 02:14
사실 짜장면은 저렇게 되어도 어떻게 먹을 순 있는데...
컵라면 물 부어놨다가 콜 받아서 갔다 오면...
정말 슬퍼지죠 ㅠㅠㅠㅠ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5/28 01:35
컵라면은 저도 종종. 매일 라면이 아니라 우동을 먹지요. 냉우동.
Commented by JJuN@ at 2009/05/26 02:35
아이고, 식사도 제대로 못하실 정도로 바쁘시군요! 정말 고생이 많으셔요- 역시 힘든공부 하시는 만큼 애환이 글 곳곳에 묻어나오는 듯 해요.

뭐 일전의 폴리클님 포스팅들도 그렇지만 지식을 체계화해서 정리하는데 일가견이 있으신 분이니... 지금 고생하시는거 조금만 정리해서 체화하시면 최고의 의사가 되실 수 있을겁니다! 건강 잘 챙기시고 힘내세요~ 생각같아서는 영양제라도 챙겨드리고 싶다능 ㅠㅠ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5/28 01:35
일가견은. 그냥 현상 유지만 했으면 좋겠습니다. 요새는 왜그리 과거 기억들이 떠오르질 않는지...
Commented by 공룡사랑 at 2009/05/26 10:15
레모나라도 사셔서 꼭 챙겨드세요. 챙겨드리고 싶지만 ;ㅅ; 위치를 몰라요 ㅎㅎ
식사를 천천히 할 수 없으시니 위장이 탈나기 쉬울텐데 걱정 많이 됩니다요 ㅠㅠ
치프가 되시는 그 날까지! 위장도 폴리클 님도 힘내셔야 합니다욧.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5/28 01:36
위장은 위장효과님? 하하. 요새는 멋진 주부로써 어머니로써 잘지내시나요?
Commented by ICEAGE at 2009/05/26 11:52
명인대병원 장과장 曰 (별미 짜장을 보고...)

"이게 별미지... 맛있지?... 죽은 사람은 못 먹는거야... 감사하게 먹어"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5/28 01:36
하얀거탑. 다시금 보고 싶네요.
Commented by 아노아캔 at 2009/05/26 12:17
식사할 시간도 없이 바쁘시군요 ..
어찌된게 의사가 더 빨리 건강을 잃겠습니다.ㅜㅜ
그래도 시간 짬짬이 날때 이것저것 많이 챙겨드세요 !!

담부터는 밥종류를 시키세요 짜장밥.짬뽕밥 !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5/28 01:37
다음부터는 밥 종류로 시키려구요. 꼭!
Commented by blus at 2009/05/27 18:31
인턴생활하면서 건강을 많이 해친다는데 아무쪼록 건강 잘 챙기시기를 바래요.ㅠㅠ..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5/28 01:37
오랜만입니다. 살이 쪄서 더 문제네요. 하기야 건강은 더 악화되어가고 있는게 맞지 않을까 싶어요.
Commented by 만화항생제 at 2009/05/28 00:30
언제 콜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추천메뉴 '돌솥비빔밥'
시간이 지나 먹어도 누룽지 긁어먹는 재미가 있어요.ㅎㅎ
Commented by Polycle at 2009/05/28 01:38
차가운 돌솥비빔밥도 맛있지요. 그나저나 이렇게 유명하신 분이 친히 발걸음 해주시다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학창시절 선생님의 만화를 보며 항생제를 이해했더랬지요.
Commented by 우리 at 2009/05/28 09:06
과일 좋아하시면 바나나 강추~~ 아침 바쁠때 틈틈히 드세요~공복으로 바쁘게 뛰어다니시는 것보단 나을 거에용~그리고 지난번 글보니 변비끼도 있으시던데.. ^^;;; 변비엔 많이 익은 바나나로~~ 헤헷~~
Commented by 깡패병아리 at 2009/05/28 16:02
병원생활의 필수품 짜장과자군요.(저흰 짜장이 올려진 면덩어리를 그렇게 불렀다능...)
짜장이 먹고싶은 주말엔(전 왠지 주말에 그리 짜장이 먹고 싶더라구요)그나마 쟁반짜장이 진리!
이미 비벼져 있기 때문에 물을 살살 뿌려 가며 풀면 그나마 풀어진다능...
지금 생각하니 그 시절이 아득하네요
인턴 힘내십시오!!!
Commented at 2009/05/29 16:4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Feux at 2009/06/08 23:50
떡이 되어버린 자장면 대목에서 박경철 선생님 책의 흡사한 구절이 떠오르는군요.

힘든 인턴 생활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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