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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영어

 
1.응급실에 근무하다보면 가장 짜증나는 타입의 환자는 아무래도 술 마신 환자들이 아닐까 싶다. 술 마시고 싸우다 와서 몸져 누워있는 사람, 술 마시고 자살 시도하려다 구조되어 실려온 사람, 술 마시고 약을 몽땅 들이부어 혼수상태에 빠져오는 사람... 그 종류도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일곱 빛깔보다 많으니 술로 인해 정말로 다양한 군상들이 응급실을 방문한다고 해도 어색한 표현이 아닐 것이다.

 새벽 3시. 한 여자가 응급실로 급하게 실려왔다. 딸로 추정되어 보이는 한 여성이 내게 약 봉지를 건네며 어머니가 맥주 3병과 함께 수많은 알약을 삼켰다고 빨리 처치를 해달라며 내 팔목을 잡았다. 환자의 동공반사나 호흡, 맥박, 혈압등 생체징후는 안정적이었지만 환자 상태는 약간 drowsy한 상태였다. 약 봉지 속에는 triazolam계통의 수면제 30알과 기타 약물 일주일분이 들어있었고 triazolam 계통의 수면제 3알을 제외하고는 모두 보존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자료만으로는 환자의 복용 정도 및 상태 이상 여부를 정확히 알 수 없었기에 여느때처럼 비위관을 삽입하기로 결정했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비위관을 삽입하여 위세척을 할꺼란 설명을 했으며 이내 간호사가 가져온 셋트로 코부터 관을 삽입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코를 통해서 목구멍으로 긴 관이 넘어가는 고역스러운 이물감 탓에 환자는 강하게 저항했고 왼손으로 내 가슴을 수차례 가격했다. 175cm의 장신 여성의 파워는 가히 가공할 만한 수준이었고 결국 이대로는 힘들다 판단하여 억제대로 팔목을 묶어두기로 결정했다.

 다행히 비위관은 한번에 위까지 도달했고 픽스 테입으로 고정을 시키고 위세척을 시행했다. 대개 100~200ml정도 생리식염수를 주입하고 세척을 시작하지만 환자의 경우엔 많은 맥주를 마신 탓에 이미 위 속에 다량의 액체가 고여있어 별도의 주입이 필요치 않았다. 그리고 주사기 피스톤이 앞뒤로 수차례 왕복을 하면서 총 3.5L에 달하는 맥주를 환자의 위 속에서 추출해냈다. 세척 내내 맥주 냄새가 진동했으며 그 풍미는 가히 술 한방울 먹지않았던 나조차 취할정도였으니 다른 말이 무에 필요하겠는가. 세척 결과 다량의 맥주 외에는 특이한 점이 발견되지 않았고 환자는 이내 잠이 들었다. 그리고 1시간쯤 지났을까 자신이 왜 여기 실려왔냐며 수액 라인을 강제로 뽑아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자퇴각서를 쓰고 응급실을 유유히 걸어나갔다. 밤새 자신을 위해 고생한 의사와 간호사의 수고는 모른채 소리만 지르고 가는 그 환자 무척이나 얄미웠다. 그럴꺼면 술 마시고 헤롱거리다 응급실에 실려오지나 말던가. 하기야 그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다 술 탓이지.
  
2.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을 혐오하는 한 사람으로써 대한민국 주입식 영어 교육의 병폐를 요즘 응급실에서 톡톡히 맛보고 있는 중이다. 새벽 2시, 한 독일인 여행객이 복부통증과 설사를 주소로 응급실에 실려왔다. 병원 근처에 미 군부대와 항구가 인접해있는지라 외국인 환자들이 종종 실려오곤 하는데 독일인은 처음이었다. 중국어는 어느정도 자신있었기에 중국인 환자가 오면 반갑고, 영어는 hearing과 speaking의 편차가 너무 큰지라 영어권 환다가 내원해오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 외 유럽, 이슬람, 러시아 환자가 오면 마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는다.

 환자에게 다가가서 유일하게 아는 독어인 '구텐탁'과 '이히 핀데 에스 쇤' 두 마디만 중얼거리다 'can U speak english?'라고 물었고 'a little'이라는 대답에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그 환자 역시 speaking에는 약했던지라 그후로 우리는 body language를 통해 20여분간 대화를 나누었고 이내 검사와 치료를 시작했다. 딱 보기에도 여행자 설사나 감염성 장염이 의심되었지만 혹시나 모를 surgical abdomen의 감별을 위해서 몇가지 검사를 시행했고, 얼마뒤 대변 검체 결과가 나오고 그 외 자료들을 토대로 감염성 장염이라는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었으며 항생제 치료를 시작했다. 그 환자와 내가 정확히 증상 및 이학적 검사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아직까지도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찌어찌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한 마음으로 의기투합하여 검사와 치료를 시행했다는 점에 개인적으로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3일전 미군부대에서 한 여자가 산부인과적인 문제로 내원했을땐 대화에 무척이나 어려움을 겪었지만 금번과 같은 경우엔 어려움이 덜했다. 역시 콩클리쉬는 콩글리쉬와 통하는 것일까. 그 독일인 환자와 나는 서로 눈빛을 주고 받으며 그렇게 긴 밤을 넘겼다.

by Polycle | 2009/03/27 10:34 | 일기 | 트랙백(1) | 덧글(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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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살아가기 at 2009/03/27 11:57

제목 : "미디어악법(방송악법) 반대"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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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매모리 at 2009/03/27 10:45
영어를 잘한다고 똑똑한것 아닌것같습니다 저도 어느정도하지만 쓸모없더라구요
특히 우리나라 영어교육은 쓰잘데없는 입시영어죠 외국에나가거나 외국인하고 접했을떄는 무용지물이죠 그냥 단어하고 문법 요즘에는 쓸모없는 영어교사들이 지네들 가르치기 좋겠 문법을 개조해서 가르치더라구요 그냥 영어회화라면 5분짜리 대사를 외우고 말하는게 전부더라
누가 영어 를 하겠어요
Commented by puella at 2009/03/27 11:10
콩글리시는 콩글리시와 통한다....완전 공감해요ㅎ
Commented by 자적 at 2009/03/27 11:21
고생 많으시네요... 즐거운 여행중에 아프면 참 안타깝죠 ㅎ
Commented by 헤비스 at 2009/03/27 11:27
인턴일기 오랜만이에요!
Commented at 2009/03/27 11:5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rainblue77 at 2009/03/27 12:35
영어....하면 머리 아파요.
학교에서 단어 시험등을 보면 그 단어 그대로의 악센트를 가지고 외우기 보다는..
나 편할 대로 외우다 보니 선생님이 영어로 말하고 단어 뜻을 적으려면 막혔던 기억이 나네요.
가끔 영어권 사람과 마주쳐서 뭔가 저한테 물으려고 하면 겁부터 나요.ㅎ
차라리 전혀 영어를 모른다면 더 나을텐데..
어설프게 안것이 더 그런 것 같아요.;;;;;

그나저나 정말 힘드셨겠어요.
힘들게 위세척하고 했는데...그러시면..음........

응급실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새로운 세상 이야기 같아요.
평소에 응급실에 갈 일도 없고 하니..
딴 세상 같아요.

기운이 쑥 빠지시겠어요.
그래도 아자아자`!!!!!
Commented by draco21 at 2009/03/27 12:41
.... 그래도 마음으로 대화가 가능하셨군요... ^^: 보통 저는 한마디도 안나오던데요... ^^: 영어건 독어건.. ^^:
Commented by 나막울었어 at 2009/03/27 12:46
위세척할때 코로 넣는지는 몰랐는데..윽...
저 그거 되게 무섭더라구요
코로 호스 넣는거;;
Commented by organizer at 2009/03/27 13:03
그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다 술 탓이지"

이 말에 위안을 얻습니다.
Commented by 페브 at 2009/03/27 15:01
^^ 잘 읽고 갑니다.
정말 응급실에 있으면 별의별 환자를 다 만날 수 가 있겠네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힘드실것 같기도 하구요....
아무튼 고생이 많으세요-
Commented by 위장효과 at 2009/03/27 16:54
ㅋㅋㅋㅋㅋㅋ 그에 대한 재미있는 경험을 한 사람이 있는데,

서부 사하라 유엔 평화유지군에 파병갔다 왔는데 거기 국적이...사령관 인도육군 대령을 정점으로 해서 영국, 프랑스, 스페인, 우크라이나, 러시아, 중국, 인도, 그리고 모로코등등 다양한 나라의 군의관과 장교, 부사관들이 모여있었습지요.

그런데 우크라이나, 러시아, 중국, 한국 이렇게들 모여서 각자 자기네 나라 독주 내놓고 술마시면서 즐겁게 엉터리 영어로 의사소통 잘 하면서 떠들고 놀다가도, 영국군 장교만 들어오면 다들 벙어리가 됩니다^^. 서로 "누가 쟤하고 놀아줘라."뭐 그런 눈치 주면서 말입니다^^;;;
Commented by 지나가던29세남 at 2009/04/12 22:31
ㅎㅎㅎ 재미있네요
Commented by 휴~~~ at 2009/03/27 20:37
병원 응급실이라는곳은 정말 다른세상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가능하다면 모르고 살아야 하는곳입니다.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아차! 싶지만 빠져나올수 없는곳........
Commented at 2009/03/27 23:32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NePHiliM at 2009/03/27 23:35
으하핫 힘내세요 =ㅅ=
-네피
Commented by 실습인생 at 2009/03/28 05:07
저도 한번은 술취한 미국 사람이 온적이 있었는데 안 되는 영어로 주정 받아 주랴 머리 수쳐하랴 정신 없었더랬지요.. 의학용어는 미국 사람들도 영어지만 잘 못알아 듣던데 제 발음의 문젤까요?ㅋ
Commented by 닭고기 at 2009/03/28 07:17
생생한 응급실 풍경이군요.ㅠㅜ 혹시 무슬림이 찾아온다면 인사로는 '앗쌀라마알라이쿰'으로 해주세요. 이게 억양이 좀 중요하긴 하지만....(......)
저는 오히려 유럽/이슬람/동남아/일본 사람들이 더 편해요. 같이 영어를 못하는 처지라고 생각하니까.ㅎㅎㅎ 가끔은 눈빛만으로도 대화가 되기도 하고요.
Commented by 모기 at 2009/03/28 16:37

의사를 꿈꾸는 학생이에요.

경영학과 재학중인데 인턴X 읽으면서 의학도의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ER 일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셔요. 힘내시길!
Commented at 2009/03/30 01:4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ㅡㅡ; at 2009/03/30 16:18
일본에 있는데요...
감기인지 목이 많이 불편해서 병원에 갔더니...
잘 알보인다며 코로 내시경(?)... 카메라를 밀어 넣더라구요...
흐미... 월메나 놀랐던지...

카메라가 지나가면서 찰칵거리며 토해낸 사진들을 다 보여주시면서...
의사 선생님왈...
"결국 편도 많이 부었네요" 와 "축농증증상도 있으시군요, 불편하면 다시 오세요~"
할딱... 이궁...

어찌되었든... 코로 들어가던 그 카메라 무지 놀랐더랬습니다.
Commented by jang at 2009/03/31 21:24
영어관련해서 포탈검색해서 찾은 사전인데요... http://x-dic.com
Commented by Navi. at 2009/04/01 10:11
폴리클님 중국어를 하세요? 제 편견이겠지만 정말 의외네요!
당연히 영어를 더 잘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전에 요통으로 입원한 일본인 환자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환자는 통역을 데리고 다녔음에도 제가 직접 일본어로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들었거든요.
그러던 도중에 약간 문제(?)가 생겼습니다.
일본어가 능숙하지 않으니깐 그냥 직접적이고 간단한 표현으로 하나하나 질문해 가던 도중..
대소변 문제(처방 때문에 반드시 구체적으로 확인을 해야 됐거든요)를 '직접적으로' 물으니깐
환자가 얼굴이 빨개지면서
"(그저 허리가 아플 뿐인데) 내가 왜 이런 것까지 말을 해야 되나요 (엉엉 창피해)"
이러셨더랬죠.
통역을 통해서 질문을 했으면 알아서 훨씬 부드러운 표현으로 물어봐 줬을텐데도
전 적당히 돌려서 부드럽게 말할 줄은 모르면서 아는척은 하고 싶고..
그래서 서로 난처해졌던 겁니다..;;

아무튼, 요즘 많이 바쁘신거겠죠?
글 재밌게 읽고 있는데 점점 드문드문 올라오는 거 같아서...
Commented by 여왕님 at 2009/04/01 13:19
Polycle님, 저랑 사겨요~~ ^^ ㅎㅎㅎ (4월 1일_)
Commented at 2009/04/14 23:1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04/23 00:36
고생 많으십니다.
응급실에 계시면 정말 힘드실텐데요..
식사라도 제때 꼭 챙겨드시고요..
(잠도 푹 주무시라는 말씀은 차마 못드리겠습니다.)
Commented by 베쓸림 at 2009/08/11 00:21
저랑은 전혀 생소한 부분에서 하는 얘기라 그런지 참 재밌네요,,ㅎㅎ
수고하세요:)
Commented at 2009/11/15 21:08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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